2023.05.10 유현태
2020년, 이탈리아의 자동차 그룹 FCA와 프랑스의 PSA의 합병이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 지주회사의 명칭은 '스텔란티스', 단번에 글로벌 완성차 시장 점유율 9%를 차지하고 있는 공룡 기업이 된다. 20세기 말, 자동차 산업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크다는 '과잉생산론'이 팽배했다. 이 시기 공격적인 M&A 전략을 펼치던 대다수의 기업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한다. 때문에 대다수 자동차 기업들은 무분별한 브랜드 확장에 조심스러운 입장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규 합작사 스텔란티스의 설립은 기대가 된다. 본질은 동등한 위치에서의 '경영통합'과 '기술협력'에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 수요에 대한 피드백및 리스크 분산을 위한 목적이 보인다. 프랑스에 본진을 둔 PSA 그룹은 유럽 대륙에서의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친환경및 소형차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이다. 피아트 산하에 있던 크라이슬러나 닷지는 북미 시장에서의 인지도가 높다. 더불어 이번 주제인 '지프'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인지도와 가치를 꾸준히 쌓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푸조, 마세라티와 함께 계열사 중 높은 인지도를 갖춘 편이다.
이번 시승기의 주제는 지프 그랜드 체로키 'L'이다. 의외로 그랜드체로키는 시작부터 현행 5세대까지 대한민국 시장에 정식 수입된 바 있다. 그 뿌리는 1993년, 지프의 패밀리 SUV '체로키'의 상급 모델로 포지셔닝 되며 북미 시장을 공략하고자 했다. 비슷한 무렵 대중형 SUV 시장의 규모는 꾸준히 성장해왔고, 당연히 고급화 SUV의 수요도 늘어난다. 그랜드 체로키 L은 제5세대 그랜드 체로키의 파생형이다. 차체 전장을 늘리고 3열 시트를 추가했다. 점차 확대되는 대형 SUV 시장에 대한 포트폴리오 보강은 필수였다.
시승차량은 그랜드 체로키 L 3.6 가솔린 Summit Reserve 트림이다. 현재 한국 시장에는 3.6 가솔린 단일 엔진만 수입되며, 트림 구성은 서밋 리저브와 오버랜드 두 종류로 나뉜다. 익스테리어나 인테리어 등 많은 차별점이 있는데 서밋 리저브 모델만 2열 독립 시트가 적용된다. 즉, 6인승이다.
그랜드 체로키 L의 강인한 디자인에 큰 매력을 느낀다. 지구의 7대륙을 상징한다는 '7-슬롯' 그릴과 수평형 헤드램프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정교해져 왔다. 이 라디에이터 그릴을 역슬렌트 형상으로 세우면서 노즈를 강조한다. 덕분에 원래부터 높은 차체는 더욱 웅장한 아우라를 나타낸다. 후륜구동 SUV답게 프런트 오버행의 길이가 상당히 짧다. 서밋 리저브 트림의 경우 범퍼에 크롬 가니시를 부착하여 고급감 내지는 묵직함을 더했다.
측면은 더욱 인상적이다. 수평성을 강조했다고 느낀 캐릭터 라인은 헤드램프와 테일램프를 연결한다. 굵직한 측면 패널은 휠 하우스의 볼륨을 강조하며,사각형의 휠아치와 22인치 휠도 존재감을 키운다. A 필러에서 시작하여 리어 윈드 실드를 감싸는 크롬라인이 있다. 그 자체로 기교롭지만 완만히 낮아지는 각도는 역동성을 더한다. 이번 5세대 그랜드 체로키는 롱바디 모델을 기준으로 디자인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균형감이 훌륭하다. 오히려 숏바디 모델이 리어 오버행을 인위적으로 축소시킨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
뒷모습까지 전통적인 2박스 스타일 SUV의 감성을 담아낸다. 얇은 두께를 강조한 테일램프와 넓은 면적의 트렁크 리드가 매력적이다. 밋밋한 면은 곧 단단하다는 인상을 남기는데, 리어펜더의 볼륨을 강조함으로써 듬직함 하나는 최고다. 측면 유리를 감싸던 크롬라인은 뒷유리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전체적으로 정통 SUV의 캐릭터가 존재하는 그랜드 체로키의 디자인은 여타 대형 크로스오버들과 차별화된다. 역시 SUV의 명가 지프답게 근본을 이해하는 디자인이다.
인테리어는 놀랍도록 고급스러워졌다. 터프하고 듬직한 외관이야 이전 세대도 동일하긴 했다. 반면, 인테리어가 이토록 감각적이고 고급스럽게 변화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디지털 친화적이다. 중앙 인포테인먼트 모니터의 크기는 수치상 10.1인치인데 체감되는 크기는 더욱 크다. 터치감과 반응속도도 훌륭하다. 마사지 시트, 셀렉 터레인 등 자동차의 많은 확장 기능들을 제어할 수 있다. 서라운드 뷰 모니터도 시원하게 띄워준다. 더구나 조수석 대시패널에까지 인포테인먼트 모니터가 마련되어 있다. 새롭다.
인포테인먼트 모니터의 블랙하이그로시 패널은 센터 콘솔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조장치와 기어노브까지 디자인적 완성도가 뛰어나다. 커버 아래에는 컵홀더와 무선충전 패드가 마련되어 있다. 기어노브는 다이얼 방식인데, 기능성보다는 보기좋은 디자인을 택한 듯하다. 수동식 차고조절 레버와 셀렉터레인 버튼에는 지프만의 감성이 있다. 도어트림이나 스티어링 휠에도 우드트림, 가죽, 알루미늄 등 고급소재를 적절히 배합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서밋 리저브 트림은 뒷좌석 공간도 호화롭다. 1열도 마찬가지로 시트에는 '팔레르모' 가죽이 적용되어 최상의 착좌감을 제공한다. 캡틴 시트는 당연 리클라이닝도 가능하고, 센터 암레스트의 수납공간과 컵홀더도 사용성이 뛰어납니다. 독립 공조는 당연히 적용되었고 히팅 및 통풍도 가능하다. 수동식 선 커튼도 마련되어 있으며 파노라마 선루프의 개방감도 인상적이다. 또한, 암 레스트는 2단 접이식으로 2열 시트 폴딩시 풀플랫이 가능하도록 하는 배려도 섬세했다.
3열 시트는 전동식으로 작동이 가능하다. 나름 큰 크기의 창문도 있고 공간도 여유롭다. 당연히 2열 만큼의 거주성을 가져오진 못하나 급한대로 버틸만한 공간이긴 하다. 에어벤트나 컵홀더 등 기본적인 편의 사항까지 있다. 그랜드 체로키 L의 크기가 실감 가는 건 3열 시트를 펼쳐도 웬만한 소형 SUV만큼의 트렁크 공간이 나온다. 보통 3열 시트를 폴딩한다면 적재 공간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독특한 점은 전동 트렁크 버튼이 내부 좌측 하우징에 위치한다.
그랜드 체로키 L에는 FCA의 펜타스타 3.6 가솔린 V6 엔진이 탑재된다. 자연흡기 방식으로 스펙시트에 표기된 최고 출력은 286마력, 토크가 35.1Kg.m이다. 변속기는 ZF사의 8단 토크컨버터를 직접 생산하여 맞물린다. 섀시는 FCA의 차세대 후륜구동 아키텍쳐 '조르지오' 플랫폼을 계량했다. 공차중량은 약 2.3톤, 그나마 멀티링크에 사용되는 링크 부품에 알루미늄의 비중을 키워 무게를 낮추고 동특성을 개선했다. 서스펜션은 역시 에어스프링이 적용된다.
엑셀을 가볍게 밟으면 V6 가솔린엔진의 부드러운 회전 질감과 정숙성이 돋보인다. 철저한 방음처리가 고급화의 대목이다. 차근차근 속력을 올려봐도 불쾌한 잡소리나 풍절음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흡기 가솔린엔진의 떨림도 잘 억제되어 있다.
액셀을 조금 강하게 밟아보면 두터운 부밍 사운드가 유입된다. 민첩한 반응은 아니더라도 속도 바늘을 꾸준하게 상승시킨다. 공차중량이 높다 보니 가속성능이 뛰어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제로백은 8.4초라 하는데 실제 체감 가는 가속감도 딱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장점은 계속 언급해온 부드러운 회전질감이 아닐까 싶다. 인위적인 주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불어 8단 토크컨버터와의 자연스러운 궁합은 운전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스티어링 감각은 약한 오버스티어에 가깝고 감도는 예상보다 부드러운 편이다. 에어 서스펜션도 어느정도 충격 완화에 도움을 준다. 하나, 막연히 부드러운 승차감은 아니다. 딱 안락함을 전달하는 수준으로 적절히 하드한 감각이다. 그랜드 체로키의 차체무게로 인한 흔들림을 고려하면 어설픈 편안함보다는 주행 안정성을 위한 선택인듯 싶다. 대신 심한 요철이나 방지턱 같은 부분에서는 확실한 도움을 받는다.
중점은 오프로드에서의 차고조절 기능일 것이다. 지상고 조절 범위가 무려 270mm에 달한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라면 7.7Km/l의 공인연비다. 실망한 부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게와 파워트레인 구성을 고려하면 오히려 괜찮은 수준이라 평가된다.
아무튼 지프의 브랜드 가치는 험로주파 능력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시 외곽에서 어느정도 길이 좁고 험한 도로를 거닐었지만 두려움은 전혀 없다. 불균일한 길에서는 셀렉터레인 모드를 조절하여 구동력을 확보하고, 또 차고를 높여 장애물들을 무리없이 밟고 지나칠 수 있다. 서라운드 뷰와 같은 모니터링 장치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큰 차를 몰아도 큰 부담이 없다. 온로드 세팅의 SUV중 그랜드 체로키만큼 험로에서의 주행력을 보장할 수 있는 차종은 몇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디지털 UI다. 운전석에는 10.3인치 크기의 디지털 클러스터가 탑재된다.스텔란티스 컴페니언 앱을 설치하거나 안드로이드 오토, 애플 카플레이를 활용하면 계기판과 HUD에서 T맵의 안내를 제공받을 수 있다. 보통 수입차, 특히 미국차의 인포테인먼트는 불편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T맵의 도움을 받는 순간부터 어색함이 사라진다. 디지털 클러스터는 나이트비전까지 지원하기도 한다. 클러스터 양 끝에는 초록색 무드램프를 심어서 운전자의 주의가 필요할 때 효과적인 자극을 준다.
이 디지털 클러스터의 역량은 인포테인먼트 모니터의 존재를 무색하게 한다. 때문에 모니터에는 메킨토시 오디오의 레벨 게이지를 띄우는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풍부한 ADAS장비나 전자식 룸미러 등 지프는 차량의 성격에 따른 니즈를 완벽히 이해한다.
지프의 그랜드 체로키 L을 시승했다. 범용성을 내세울 수 있는 프리미엄 SUV라는 생각이다. 이전 세대부터 지프는 그랜드체로키를 통해 대중형 SUV 시장을 공략해 왔다. 다만 과거와 현재 SUV시장에 대한 니즈는 확실히 다르다. 오래전 SUV는 험로주파 성능이나 적재 능력 등 분명한 실용성이 강조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동성을 희생하더라도, 보다 안락한 승차감과 편의성을 확보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게 크로스오버 시장이다. 이번 그랜드 체로키L은 여러 측면에서 온로드 타입 SUV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정통 오프로더의 감성도 풍부하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그랜드 체로키 L은 '지프'라는 브랜드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였다. 생각해 보면 지프도 그 어떤 프리미엄 브랜드에 비해 헤리티지가 열세하지 않다. 대신 '오프로더'라는 분야 자체가 한국 시장에서는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브랜드의 성격도 보수적이다. 하지만 그랜드 체로키에는 미국 브랜드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프리미엄이 가감 없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