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0 유현태
제 3세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L322를 시승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레인지로버 L322는 클래식카 동호인들 사이에 올드카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꼭 소유해 보아야 하는 차량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지금 자동차 시장은 럭셔리 브랜드부터 하이엔드까지, 하물며 대중 브랜드까지도 대형 SUV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장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수익성과 대중성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10년 전만을 떠올려 보아도 '고급 SUV'라는 개념이 보편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인지로버는 사실 다목적 자동차 전문 브랜드 '랜드로버'의 생존 전략과도 같았다. 20세기에 SUV와 승용차는 분명히 다른 목적을 품은 자동차였다. 지금 랜드로버는 럭셔리 SUV의 대명사라 하지만, 디펜더나 시리즈 90과 같은 모델을 생산할 때까지만 해도 정비성이 뛰어나다는 것, 하물며 물청소가 쉽다는 등 실용주의에 의거한 특징을 앞세워왔다. 그만큼 수요는 한정적이고 자금력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북미 시장을 타게팅 하여 온 로드와 오프로드를 아우를 수 있는 현대적 개념의 SUV를 출시한다.
레인지로버의 기원이다. 역설적이게도 21세기는 바야흐로 SUV의 시대라 한다. 정확히는 승용차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대신, SUV의 형태와 장점을 섞은 '크로스오버'의 시대라 볼 수 있다. 그 태동기가 2000년대 초반부터가 아닐까 싶다. 조금 더 앞서서 대한민국의 브랜드들도 작은 크기의 보급형 SUV를 양산했고, 비슷한 무렵 랜드로버는 3세대 레인지로버의 차체 구조를 '풀 모노코크' 방식으로 수정했다. 해당 프로젝트 코드가 'L322'에 해당된다. 이번 시승차량 말이다. 정확히 레인지로버 L322의 후기형 페이스리프트 모델로 라인업중 가장 안정화된 상품성을 갖추었다.
디자인은 장엄하다. 1970년 1세대부터 5세대가 공개된 지금까지도 답습해오는 형식이다. 사각형의 헤드램프와 연결된 그릴, 클램셸 형태의 보닛과 측면을 가르는 스웨이지 라인까지 단아하고 깔끔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3세대 레인지로버가 역대 모델 중에 가장 꾸밈이 없고 정제된 분위기를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출시되는 SUV들은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디자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지만, 레인지로버가 지닌 캐릭터는 대형 SUV 그 자체라는 의미다. 프런트 오버행이 짧고, 휠베이스가 길게 뻗은 비율만 보아도 레인지로버 다운 모습이다.
보면 볼수록 멋스럽게 빠져있다. 차체와 섀시를 일체화하는 모노코크 바디를 채택했지만, 지상고를 높게 세팅함으로써 바디온 프레임 SUV와 같은 비율이 느껴진다. 클램셀 후드는 엔진룸을 측면까지 통으로 덮는 보닛 디자인을 의미한다. 각 패널 간의 단차를 없애고, 또 측면 분할선은 캐릭터 라인과 연결함으로써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윤곽을 강조한 보닛 형상은 마치 웅장한 성과 같아 보인다고 하여 '캐슬 보닛'이란 애칭이 있기도 하다. 3열 창도 굉장히 넓은데 필러의 색상까지 통일하여 끊임이 없는 '심리스' 한 스타일링이 특징이다.
레인지로버의 디자인은 그런 식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남다른 디테일이 첨부되어 있다. 그 차이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기보다도, 대중적인 자동차와는 다른 은은한 분위기를 발현한다. 실내 디자인도 단정한 편이다. 놀랐던 점은 클러스터가 풀 LCD 방식이었다. 확장성이 요즘 차량처럼 다양하진 않더라도, 직관적인 시인성과 깔끔한 UI가 고급 차량 다운 면모였다. 그리고 시동을 걸면 다이얼 변속기가 솟아오른다. 그 부드럽고 정교한 메커니즘은, 최근 양산 브랜드의 다이얼식 변속기와 다른 차원의 감성이었다.
최근 차량들과는 다르게 센터페시아에 많은 버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만큼 당시에 가능한 수많은 기능들을 첨부하기 위한 흔적이라 볼 수 있겠다. 베이지 컬러의 가죽과 하이그로시 패널, 알루미늄 등으로 마감한 내장 소재의 고급감은 명불허전 럭셔리 SUV의 모습이다. 당연 뒷좌석도 고급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모니터, 전동시트 같은 다양한 VIP 옵션은 물론이고, 시트는 두껍고 부드럽다. 트렁크가 위아래로 개방되는 스플릿 게이트 또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연결되는 레인지로버만의 감성 요소다. 가볍게 걸 터 앉기에 안성맞춤이다.
레인지로버 L322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출시되었던 V8 디젤 모델 엔진을 탑재하고 있다. 원래 3세대 레인지로버의 개발 당시에는 랜드로버가 BMW 산하에 있었다. BMW는 자체 SUV 라인업을 양산하면서 랜드로버를 매각하고, 랜드로버가 포드의 프리미어 오토 그룹에 편제되면서 자체 엔진 유닛을 적용하게 된 흐름이다. 배기량 4.4L의 디젤엔진, 디젤 게이트와 라이트 사이징 트렌드에 물든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엔진 유닛이다. 시동을 걸때 느껴지는 우렁찬 회전 질감, 이내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정숙함은 레인지로버의 명성에 걸맞다.
디젤엔진의 장점이 초반 토크이듯 육중한 무게를 의식하지 않고 낮은 RPM에도 부드럽게 가속한다. 승차감 또한 인위적인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2.7톤의 SUV로 요철을 짓누르는데, 운전자 본인은 마치 소형 승용차를 모는 듯 사소한 진동만이 느껴지는게 신비할 따름이다. 무엇인가가 고급스러운 승차감을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다. 랜드로버는 승차감을 위해 에어스프링 서스펜션을 SUV에 도입했던 선대 브랜드였다. 그리고 L322는 역대 최초로 모노코크 바디를 채택하며 독립 현가를 채택한 바 있다.
스티어링 휠의 직경이 참 넓다. 그립은 차갑고 단단한 느낌, 그리고 정차 시에는 조향감이 꽤 무거운 편이다. 그럴 때만 2.7톤을 넘어서는 거구를 운전하고 있다는 게 체감 간다. 4.4L TDV8 엔진의 최대토크는 71.3Kg.m이며 최대출력은 313마력에 달한다. 변속기는 8단 토크컨버터, 의외로 9.6 km/l라는 공인연비는 투박한 외모에 비해 효율적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지금보다는 디젤엔진의 질소산화물 배출에 예민하지 않았던 시기일 것이다. 여담으로 실질적 환경보호는 저탄소 차의 빠른 보급보다도, 자동차의 교체 주기를 늘리는 게 올바른 접근이라 생각한다.
평온한 승차감과 묵직한 핸들링, 여유로운 출력까지 사실 십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급 SUV가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다는 것을 레인지로버를 통해 알 수 있다. 생각보다 현대적인 SUV 들과 승차감의 차이가 크지 않다. 지금에서야 연식이 오래되었으니 약간의 잡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반면 온갖 전자 장비와 터치스크린으로 도배된 현대 시대의 SUV들은 뭔가 탐탁지 않은 느낌이 있다. 너무 획일화되어가는 느낌이랄까, 감성을 따져보기 전에 감성이 의미가 없는 '모빌리티'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다.
영국차의 낭만이라는 게 분명 있다. 말로 정확히 형용하기는 어렵다. 경제부흥을 배경으로 과시 문화가 발달했던 미국 자동차 산업, 반면 패전국의 위치에서 중공업의 정점에 이른 독일,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어떠한 측면에서는 하염없이 사치스럽지만, 이따금 독일의 승용차처럼 내실이 다져진 자동차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L322가 그랬다. 한편으로는 참 사연이 많은 레인지로버다. BMW 산하에서 기획되었고, 포드의 계열사로 차량을 판매하지만, 금융위기를 지나 인도의 타타 그룹 산하에서 차세대 모델을 준비하게 된다.
아무렴 L322는 럭셔리 SUV 시장을 장악하고자 했던 랜드로버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다. 랜드로버의 기술력을 대표하는 기능 중 터레인 리스폰스를 빼놓을 수 없다. 전자식 지형반응 사륜구동 시스템이다. 생각해 보면 최근 출시되는 럭셔리, 하이엔드급 SUV 중 본질적으로 험로 주파 능력을 앞세워 홍보하는 브랜드는 전무하다. 형식상의 SUV를 추구하기 때문, L322는 터레인 리스폰스 기능이 최초로 구현되었던 모델이기도 하다. 레인지로버의 발전에는 당대 SUV 시장의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레인지로버 보그 SE TDV8 시승기를 마친다.
글/사진: 유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