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7 유현태
수요와 공급에 대한 정확한 이해관계는 없다. 수동적인 기업은 늘어나는 수요에 공급으로 대응할 수야 있겠지만, 후발주자로서는 높은 판매량과 영업익을 기약하기 어렵다. 더구나 자동차와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은 생산 카파를 확장하고 대규모 인력을 채용할 때, 장기적인 운영 리스크는 더욱 가중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반대 시각에서 경제학자 세이는 공급을 늘리면 수요가 증가한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공급을 통한 경제적 가치 창출은 또 다른 수요를 야기한다는 것, 하지만 자본의 흐름과 화폐가치는 언제나 불규칙적이다.
자동차 산업은 규제나 경제성장에 따른 트렌드의 변화에 굉장히 예민하기도 하다. 결국 기업들은 수요를 따라 투자하기 십상이다. 트렌드의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품은 소비자들도 분명있다. 하지만 절대 다수는 아니다. 그래서 자동차 기업들은 브랜드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미래 가치를 찾아나선다. 이는 자동차의 오랜 역사 이래 '정통성'을 잃었다고 평가받는 기업들이 많아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반면 정통성을 포기하는 기업들이 많아질수록, 살아남은 헤리티지 브랜드들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그런 측면에서 지프의 랭글러는 오랜 연혁과 가치를 정립해온 차량이다. 1987년, 정식으로 1세대 랭글러가 출시된 이후, 기조가 되는 레이아웃과 디자인을 변경하지 않았다. 부분적인 변경과 개선을 반복하면서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품질과 성격을 가꾸어온 셈이다. 2023년, 시판 중이던 4세대 랭글러 'JL'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공개된다. 여전히 기조와 본질을 답습하고 있다. 함께 시장의 요구를 받아들인 개선점도 확실해 보였다. 어쩌면 순수 내연기관으로는 마지막 랭글러가 될수 도 있다.
시승 차량은 지프 랭글러 2.0 가솔린 터보 Rubicon 페이스리프트 하드탑 모델이다. 가솔린 모델은 2.0L급 터보만 제공되고, 옵션 등급은 총 세 가지로 구분된다. 염가형 '스포츠' 트림과 도심 주행 세팅의 '사하라' 그리고 오프로드 주행용 '루비콘'이다. 사하라와 루비콘은 하드탑을 기본으로, 캔버스탑 형식의 '파워탑' 옵션이 제공된다. 페이스리프트의 주요 사항으로는 디자인 변경, 고릴라 글래스 적용, 12.3인치 무선 미러링 디스플레이, 전동 시트, 어댑티브 스마트 크루즈 탑재 등이 있겠다.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더 상징적인 디자인이 되었다. 랭글러는 2세대부터 동그란 원형의 헤드 램프를 적용해 왔는데,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테두리에 LED 라인을 감싸면서 보다 정체성이 확고해진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면적을 넓힌 모습은 보다 대담하다. 그리고 북미형 범퍼를 적용하면서 더욱 오프로더 다운 강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래는 프런트 펜더의 면적이 넓었었는데, 35인치 휠 탑재를 고려하면서 얇고 높아졌다. 플라스틱 소재 마감은 오프로드 특화 '루비콘' 사양의 특징이다.
측면 디자인은 정통 SUV의 비율을 보인다. 바디 온 프레임답게 지상고도 높다. 생각보다 보닛 길이가 긴 편이다. 캐빈 룸도 넓어 보인다. 사진상으로는 휠 인치가 작고 공간이 넓다 보니 차량이 작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덩치에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북미형 펜더를 적용하면서 휠 하우스가 더 커진 셈이다. 기본 장착 타이어는 33인치, 사계절 전용이다. 새로 디자인된 휠은 스포츠카와 림이 분리된 느낌이라 개성적인 면모가 강했다. 도어는 분리가 가능할 수 있도록 경첩식을 채택했고, 하드탑 루프를 탈착하는 것도 가능하다.
페이스리프트 이후 후면 디자인에서는 큰 차이점을 알아보기 어렵다. 전면과 다르게 범퍼도 기존과 같은 유럽형이 채택되어 있다. 테일램프 형상도 같아 보인다. 여담으로 북미형 범퍼는 번호판이 좌측에 부착된다. 그래도 신형이라는 점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특징은 있다. 휠 디자인이고, 스페어 타이어도 실제 사용되는 휠과 같은 스펙이다. 범퍼 하단부에는 견인고리와 머플러 팁이 노출된 모습이다. 하드탑 루프를 채택하면서 테일게이트와 뒷유리는 분리되어 있다.
인테리어도 일부분 변화를 거쳤다. 센터페시아에 12.4인치 가로 디스플레이를 적용했고, 기존의 원형 에어벤트는 스크린 하단에 일자형으로 배치했다. 이 외에는 전동 시트나 스티어링 휠 버튼 구성이 달라진 차이가 있다. 스크린의 확장만으로 분위기는 많이 달라진다. 미래적인 감성은 물론, 인터페이스의 개선은 사용성을 대폭 향상시킨다. 이 외 아날로그 타입 디스플레이나 각종 버튼, 기계식 변속기와 트랜스퍼 케이스 조작 레버 등 전반적인 구성은 디자인보다 기능을 따른다. 도어 분리 기능을 위해서 창문 버튼도 센터페시아에 있는데, 조수석 입장에서는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2열 공간도 거주성을 확보하고 있다. 물론 시트가 다소 딱딱하고 실내 마감이 거칠게 느껴지긴 하더라도, 공간 자체가 좁게 느껴지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곧게 솟아있는 창문 덕분에 개방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편의 장비는 에어벤트와 USB 포트, 암레스트 컵홀더 등으로 무난한 구성이다. 트렁크는 테일게이트를 열고, 가스 리프트로 방식의 윈드 실드를 개방할 수 있는 구성이다. 트렁크 면적은 평탄하고 넓다. 2열 시트는 평탄하게 접을수도 있다. 다만 스피커와 롤케이지가 노출된 채 공간을 차지하는 구조라서, 기대보다는 좁은 공간일 수 있겠다.
처음 시동을 걸때 LCD에 표기되는 애니메이션 그래픽이 인상적이다. 거친 외모와 다르게 엔진 시동은 부드럽게 걸리는 편이다. 경사가 높지만 면적이 좁은 앞 유리, 그 너머에 보이는 사다리꼴 형태의 후드 디자인이 랭글러 특유의 감성을 자극한다. 발진감은 묵직하다. 엑셀 페달은 서스펜디드 타입, 전체적인 승차감은 단단함이 기본이다.
2.0 가솔린 터보 엔진의 최고출력은 272HP, 최대토크는 40.8 kg.M 수준이다. 변속기는 8단 토크컨버터에 2단 트랜스퍼 케이스를 갖추고 있다. 파트타임 4륜 구동이라서 구동력은 상시 후륜으로 전달되지만, 접지력 손실 시 순간적으로 센터락을 걸어주는 '4륜 오토' 모드도 탑재되어 있다. 전체 공차중량은 약 2.1톤, 크기와 형식을 생각하면 경량화에 꽤나 신경 써왔다는 점이 체감간다. 이전 대비 섀시에서만 90kg을 감량했다고 한다. 공인연비는 7.5Km/l로 기대를 안하면 만족할 수 있다. 변속기 세팅도 효율보다는 초반 토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루비콘 차량은 승차감이 사하라에 비해 딱딱하게 설정되어 있다. 오프로드 성능을 강화하기 위함이지만, 나름대로 온 로드에서도 차체 중량에 의한 쏠림이 잘 억제되어 있는 느낌이라 좋았다. 방지턱이나 포트홀도 그 구간에서의 충격은 심하게 올라오지만 리바운드 없이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리고 페이스리프트 이전과 비겨하자면 한결 부드럽긴 하다. 아무래도 사계절 타이어가 기본 적용되면서 특유의 딱딱함이 조금 완화된 것 같다.
조향장치가 리서큘레이팅 볼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조향감이 무겁다. 보통 스티어링이 묵직하다면 예민한 조향감각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랭글러는 일반적인 파워스티어링보다 유격이 심한 편이다. 때문에 저속에서는 다소 묵직하면서도, 고속에서는 약간의 진동과 둔감한 조향감을 가졌다. 투박한 차체 형상을 따라 풍절음 유입도 어쩔수는 없다. 그리고 승용 SUV와 다르게 엔진이나 드라이브 샤프트 소음도 크게 유입된다. 음색 자체가 거칠진 않아 낭만으로 받아들인다.
그래도 전반적인 출력은 만족스러운 편이다. 초반 가속은 정말 답답함이 없고, 시속 100KM까지는 꾸준히 속도계가 상승하는 모습이다. 애초에 승용차와 SUV는 목적부터 다르니, 랭글러 정도의 승차감이면 정통 SUV치고는 훌륭한 편이라 느낀다. 바디 온 프레임 방식이지만 모든 차륜에 현가 장치로 멀티링크를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단단한 서스펜션 세팅을 바탕으로 전자식 스테빌라이저까지 기본이라서, 고속 선회시 안정성을 확보하는 셈이다.
전자식 스테빌라이저는 세팅값 제어는 아니고 체결 여부를 조작하는 기능이다. 보통은 해제하지 않고 주행을 하며, 양측 휠을 연결하여 코너링시 롤을 억제한다. 오프로드에서는 타이어의 상하운동 거리가 자유로워야 한다. 그때 스테빌라이저를 해제할 수 있다. 더불어 극한의 도호 환경에서는 Low 기어를 맞물려 네 바퀴에 높은 토크를 전달할 수 있다. 사하라보다 루비콘의 저속기어 기어비가 더 크다. 물론 해당 기능들은 페이스리프트 이전부터 적용되어 있었다. 변화의 초점은 편의성에 있고, 앞 차간 거리 유지가 가능한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 스마트폰 미러링 기능 등 온로드 주행에서의 만족감은 확실히 개선되었다.
지프 랭글러 2.0 가솔린 루비콘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시승했다. 디자인은 더욱 상징적으로 변화했고, 편의성은 한 단계 발전했다. 기본적으로 딱딱하지만 타이어 세팅을 변경하면서 승차감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한국 시장에서 랭글러는 기능성보다도 독특한 제품성에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도 복잡성을 키우는 전자장비는 지양하는게 맞다. 다만 전동 시트나 터치스크린 등 막상 발전된 편의 장비들을 접하고 보니 편리해서 나쁠 게 없기는 했다. 그렇게 이성과 감성의 타협점에 점차 수렴해 가는 듯 하다.
글/사진: 유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