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7 이순민
피비 필로가 돌아온다고 합니다. 2018년 가을 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패션계를 떠난 그녀의 컴백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매체는 물론 많은 ‘올드 셀린느’ 팬들이 열광했습니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마이클 코어스와 호베르토 메니체티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셀린느를 만들어 낸 장본인입니다.
피비 필로를 이어 셀린느를 맡은 에디 슬리먼은 여전히 브랜드의 확장과 상승을 이끌고 있습니다만, 많은 이들이 지금을 셀린느의 호시절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그녀가 브랜드에 미친 영향력이 큰 만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크기 때문이겠죠. 그녀 특유의 현대적이고 간결한 감성은 지루했던 브랜드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옷을 입는 새로운 방식과 태도까지 제시했죠. 여러 의미에서 브랜드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한 셈이죠.
이처럼 디자인은 판매나 브랜드 가치에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는 자동차 업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자이너의 감각 하나로 브랜드의 운명이 바뀐 사례가 종종 있죠. 가깝게는 기아부터 멀게는 재규어나 볼보까지. 또렷한 디자인으로 무서운 상승세를 이뤄낸 푸조도 그런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르노 그룹으로 떠난 질 비달 전 수석 디자이너가 있었고요.
스텔란티스 이전의 이야기
유럽에서 판매량이 곤두박질 치던 푸조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을 조명하기에 앞서 브랜드의 역사를 먼저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합니다. 독일 제조사가 뚜렷한 강세를 보이는 국내에서 프랑스 브랜드 푸조는 다소 낯설기도 합니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국내에 등록된 수입차는 총 21만 4,668대인데, 푸조의 등록대수는 1,667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율로 보면 0.78%로 1%조차 되지 않는 수치이죠.
단순히 올해만 부진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푸조가 국내에 처음 진출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5만 대 이상 판매했는데, 그리 만족할 만한 수치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작년 한 해 동안 메르세데스-벤츠의 E클래스는 우리나라에서 3만 3천 대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단일 모델의 1년 판매량이 3만 대 이상을 기록한 셈이죠. 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120만 대에 이르는 푸조의 세계 판매량과 비교했을 때도 국내의 판매량은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에서 비교적 낮은 판매량과 낮은 인지도는 안습이긴 하지만 푸조는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사 중 한 곳입니다. 무엇보다 200년이 넘는, 정확하게는 211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제조사죠. 제분소를 제철소로 개조하면서 시작된 푸조는 비록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삼륜 증기 자동차를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1891년에는 타입 3도 선보였고요. 타입 3는 세계 최초로 대량 생산된 사륜차로, 총 2,045km에 이르는 최초의 사이클 대회에도 출전하기도 했답니다.
1896년에는 자동차 사업(오토모빌 푸조)을 따로 분리하고, 프랑스 오댕쿠르에 첫 번째 자동차 공장도 세웁니다. 이 때가 1897년입니다. 그리고 경술국치의 해이기도 한 1910년, 푸조 가문에서 운영하는 리옹 푸조와 합치면서 새로운 주식회사 오토모빌 에 시클 푸조가 설립됩니다. 단일 사업체로 운영되기 시작한거죠. 지난 2012년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소쇼 공장은 이렇게 단일 사업체가 만들어진 이후에 탄생했습니다.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PSA는 1965년 등장합니다. 푸조 주식 회사라는 의미의 PSA는 푸조 그룹사 전체를 총괄하는 자동차 그룹 지주사입니다. 1976년에는 시트로엥도 합류합니다. 2016년부터는 그룹 PSA가 되어 푸조와 시트로엥 뿐만 아니라 DS까지 아우르게 되고요. 그 이후 그룹 PSA는 2019년 피아트 크라이슬러 오토모빌스와 합병을 발표했고, 이게 바로 스텔란티스의 시작입니다. 프랑스 한 지역 공장에서 시작된 푸조는 현재 160곳 이상의 국가에서 1만 개가 넘는 네트워크를 보유한 글로벌 브랜드로 발돋움 했습니다.
위기와 함께 찾아온 터닝 포인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생산된 203(1948)를 시작으로 404(1940), 504(1968), 104(1972), 604(1979), 205(1983), 405(1987), 406(1997), 206(1998)까지 푸조의 여러 모델들은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504는 1969년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370만 대 판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월드 랠리 챔피언십과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우승을 가져다 준 205는 가장 많이 수출된 모델이고요. 206은 월드 랠리 챔피언십에서 3관왕을 차지한 모델이자 7백 만 대 이상 만들어졌습니다.
푸조가 선보였던 일련의 제품들을 보면 독특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206CC만 보더라도 둥글 둥글 하지만 눈을 치켜세운 듯한 공격적인 헤드라이트가 특징이었죠. 브랜드 엠블럼 속의 사자보다는 고양이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단순히 206CC뿐만 푸조의 디자인은 펠린 룩이라고 불렸습니다. 참고로 펠린 룩은 고양이 같다 혹은 고양잇과라는 의미의 형용사인 펠린에서 따온 말입니다.
2010년 푸조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된 질 비달은 사자보다는 고양이가 떠오르던 디자인에 새로운 정체성을 입히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곡선보다는 직선으로 한층 또렷하고 강인한 디자인으로 말이죠.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가 부임한 때가 유럽에서의 판매량이 80만 대 아래로 떨어지면서 푸조가 위기를 맞이한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이죠. 푸조는 그간 유럽에서 100만 대 이상은 판매하던 브랜드였습니다.
진부하지만 역시 영웅은 난세에 등장하는 법. 질 비달의 감각 아래 차츰 발전하던 푸조의 디자인은 3008에 이르러 정점을 찍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3008은 SUV로는 최초로 유럽 언론인 배심단이 선정한 2017년 올해의 차에 등극했습니다. 푸조 역사상으로는 504, 405, 307, 308에 이어 다섯 번째로 선정된 모델이입니다.
굵은 선과 사자를 연상케 하는 디테일을 토대로 개성 있으면서도 설득력까지 갖춘 디자인은 판매량 증대로 이어졌습니다. 2018년에는 유럽 판매량을 90만 대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니까요. 질 비달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008의 단단해 보이는 차체에서 우아함과 하이엔드의 느낌을 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SUV가 남성적이라는 이미지에 국한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A필러부터 루프 그리고 리어 스포일러까지 더해진 크롬 라인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디자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검은 배경에 하이라이트가 되는 동시에 유려한 라인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사자의 발톱을 형상화한 테일램프와 함께 아이콕핏이라고 불리는 실내도 그가 푸조에 불어넣은 새로운 디자인 정체성의 또 다른 핵심입니다. 전면 유리에 가깝게 자리 잡은 클러스터, 작은 크기의 더블 플랫 스티어링 휠, 독특한 기어 노브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아이콕핏의 경험은 강력합니다. 한 번 앉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죠. 특히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 속에서 직관적인 조작으로 큰 만족감을 선사합니다.
Part 2에서 이어갈 푸조의 전기차도 이러한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행 거리는 짧아도 매력이 넘치는 푸조의 전기차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사진 / Celine, Inngenio Business Marketing, Peugeot Media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