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4 차돌박이
┃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년 뒤
┃ '자동차 공업 합리화조치' 시행한 전두환 정권
┃ 승용차 생산 금지당해 부도 위기에 몰렸던 기아자동차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기아를 살려낸 한 남자의 이야기
▶ 영상으로 보면 더 '과학적'이고 디테일한 [기아 역사 이야기]
▶ 2021년 11월 23일
2021년 11월 23일,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이자 광주 민주화운동 시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 씨가 사망했습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신군부의 무력 행사에 150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됐고, 지난 1997년 대법원은 전 씨의 반란(내란)수괴, 내란목적 살인 등 13가지의 혐의를 유죄 확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졌던 시민 학살은 광주를 탈출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씨의 보도로 세계에 알려졌고, 이 이야기는 영화 '택시운전사'로 개봉되기도 했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 이후, 잠시 주목받았던 차가 있습니다. 바로 극중 주인공인 택시운전사 역의 송강호 씨가 운전하던 '브리사 택시' 였습니다. (단, 실제 역사에서 힌츠 페터 씨는 김사복 씨의 '새한 레코드' 차량으로 탈출했습니다.)
이 '브리사 택시'는 당시 '기아자동차'의 기술력과 경쟁력을 상징하는 차였습니다. 마쯔다 프레스토 2세대를 베이스로 만들었지만, 기아가 단 3년 만에 90% 가깝게 국산화를 달성한 차였기 때문입니다. 1974년 10월 출시된 기아 '브리사' 세단은 내수 점유율 50%를 돌파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차'가 되는 영광을 누린, 그 시절을 상징하는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실제 고증을 무시하고 '브리사'를 주인공의 차로 설정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기아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 동안 456억70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설비증설과 기술개발에 투자하며 1980년대의 비상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기아에게 찾아온 건 '비상사태'였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 이듬해인 1981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의 총부리가 국내 자동차 업계로 향했던 겁니다
▶5공 신군부 정권에 '승용차 생산' 금지당한 기아
"기아자동차는 중소형 트럭 및 중소형 버스를 생산해라"
1981년 신군부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발표해 '특정 자동차 회사'가 '특정 차종'만 생산하도록 강제합니다. 이 조치로 현대자동차는 자사의 효자상품이었던 1톤 트럭 '포터' 생산이 중단되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기아의 경우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중소형 트럭 및 중소형 버스를 '전문 생산'할 것을 신군부에서 지시받으면서 '승용차 생산'이 전면 금지됐던겁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기아는 1970년 승용차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승용차 생산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승용차 생산이 금지당한 기아에 치명적인 경영위기가 다가오는건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그렇잖아도 79년과 80년의 '오일쇼크'로 자동차 업계가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기아는 돌파구마저 막혀버렸던 겁니다.
정부의 '승용차 금지' 명령 이후, 기아자동차(당시 사명은 기아산업)의 김상문 회장은 '한 사람'을 찾아갑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58년 '기아 공채 1기' 말단사원으로 기아와의 인연을 이어왔던 기아기공의 김선홍 사장이었습니다.
"꼭 되살려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소생시키든 정리하든 모든 것을 맡기겠다."
사상 최악의 위기 앞에서 창업주의 아들이었던 김상문 기아 회장은 김선홍 사장에게 기아자동차의 경영권을 넘겼습니다. 김선홍 사장은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인이었고, 뛰어난 업무실적으로 기아 창업주 김철호 회장의 총애를 받으며 임원으로 성장한 기아자동차의 신화적 존재였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존재였기에 재벌 족벌이 일반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긴다는 한국 기업사에 드문 신화적인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적인 경영권 위임과는 별개로, 기아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당시 승용차 판매가 금지당한 기아는 직원들의 임금조차 제때 지금하지 못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기아자동차의 운명을 진두지휘하게 된 김선홍 사장은 소하리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기아 사원'들 앞에서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결코 망한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신명을 바쳐 회사를 지킬 것을 결심했습니다.
토요일에 지급되지 않은 월급은 며칠만 참아주면 지급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자랑스러운 기아인입니다.
또한 자랑스러운 기아인입니다."
바로 그 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기아자동차가 갑자기 '승용차는 아니지만 웬만한 승용차보다 훨씬 잘 팔리는 자동차'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겁니다. 바로 '봉고차'의 등장이었습니다.
▶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팔다, 벼랑 끝 기아의 부활
1980년 기아자동차는 마쯔다의 박스카 베이스 1톤 트럭 '봉고'를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1981년 8월 기아자동차는 이 '봉고 트럭'의 승합차 버전 '봉고 코치'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1톤 '봉고 코치'는 대형 트럭만큼 짐을 많이 실을 순 없지만 승용차보다는 훨씬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고, 훨씬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아의 승용차 생산을 틀어막은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이후로 기아가 생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차종이었고, 동시에 타사에서는 판매할 수 없는 차종이었죠.
하지만 이미 타사에서 '미니 버스'라는 이름으로 승합차를 개발했지만 판매량이 좋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기에, 봉고 코치의 상품성 또한 희망적이지는 않았고 실제로 초기 판매량 또한 부진했습니다. 하지만 같은해 10월, 경영권을 이어받고 취임한 김선홍 사장은 이 '봉고'의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봉고 코치는 앞서 시장에 나왔던 트럭 베이스의 승합차와는 달리,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의 박스카 베이스 승합차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우수한 승차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이 '편안한 승합차'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봉고 작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봉고 코치' 승합차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 얼마나 많이 사람을 태우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지 첫 5개월 동안 팔린 봉고의 '근황'을 사진으로 찍은 '앨범 북' 제작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기아의 판매사원들은 이 '앨범 북'을 들고 학원, 교회, 병원등을 돌며 봉고차의 '활용성'을 강조하며 적극적인 영업에 나섰습니다. 기존의 차량이 '새로운 기능의 신제품'을 팔았던 것이라면 김 회장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팔기 시작한 겁니다.
결과는 기적적이었습니다. 1981년 단 1천여 대 판매에 그쳤던 '봉고 코치'는 봉고 코치는 1982년 1만 3,091대, 1983년 1만 8,947대, 1984년에는 1만 9,901대로 폭발적인 판매량 증가세를 보이며 기아를 견인했습니다. 때맞춰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은 '레저 붐'까지 일자, 기아자동차는 '봉고 오토 캠핑촌'을 운영하며 국내 최초로 '차박 문화'를 선도하기까지 했습니다.
1981년 김선홍 사장 취임 당시 누적적자 500억 원의 붕괴 직전 상황이었던 기아는 봉고 시리즈의 대 히트로 말미암아 불과 2년 만에 흑자전환하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인이었던 김선홍 사장은 1987년, 기아의 승용차 생산이 다시 허가되자 그동안 미리 준비해왔던 '프라이드'를 시장에 선보이며 또다시 '국민차'의 신화를 쓰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부도 위기에서 간신히 기아를 지켜낸 김선홍 회장이었지만 전두환 씨와의 악연은 길게 이어졌습니다. 김 회장은 1986년 대통령이던 전두환 씨와의 저녁자리에서 '겨울에는 스포츠 경기가 없어 심심하다. 기아는 스포츠단이 없는데 하나 만들어 보시죠?'라는 제안(?)에 훗날 농구스타 허재의 둥지가 된 기아농구단을 부랴부랴 만든 일화가 있는가하면, 전 씨에게 20억 원의 뇌물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 기아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좌우지간 기아는 살아남았고, 김 회장의 기아 부활 신화는 훗날 '봉고 신화'로 일컬어졌습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끝내 기아를 무너뜨렸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 회장의 '엔지니어 기질'은 결국 기아를 무너뜨렸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기술의 수직계열화, 나쁘게 말하자면 문어발식 경영을 이어온 김 회장의 경영방침으로 기아의 누적적자는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분식회계마저 적발되며 결국
김선홍 씨는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한편, 이후 재판에서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게 됩니다.
덧붙이자면 죄명은 배임과 '횡령'이었지만 하지만 개인적인 부정축재 용도는 아니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김선홍 사장의 취임 이후 지배주주가 없는 회사였습니다. 즉 '재벌'이 당연시되는 대한민국에서 경영과 소유가 완전 분리된 이질적인 형태의 기업이었죠. 이 점을 노린 삼성이 93년 기아자동차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자, 김 전 회장은 경영권 유지를 위해 500억원이 넘는 회사 공금을 사내 복지기금 관리위원회에 무상 제공해 직원 4만 명의 명의로 '우리사주'를 확보하게 한 '횡령'이 적발되었습니다. 여기에 부실한 경영상태를 감추기 위한 분식회계로 인한 '배임'혐의가 유죄 확정되며 김 씨는 끝내 징역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 사라질 뻔했던 기아자동차의 가능성...그리고...
김 회장의 퇴장이 아름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김선홍 회장의 이야기를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김선홍 회장의 '봉고 신화'가 없었더라면 1981년, 기아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적적인 부활 뒤로도 기아는 승용차 생산이 금지된 6년 동안 벌어진 '기술력 격차'와 그로 말미암은 '상품성 격차'를 97년 부도처리 전까지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부실경영이 문제였다고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수 승용차 1위' 현대자동차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던 겁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말입니다. 1970년대 가장 높은 국산화율을 달성하며 최초의 '국민차' 브리사를 만들어냈던 기아가 1981년 이후로도 쭉 승용차를 생산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기아자동차는 부도처리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