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8 유현태
랜드로버의 레인지로버 LWB P530 Autobiography를 시승했다. 랜드로버는 2024년 연식변경을 통해 레인지로버의 일부 실내 사양을 수정하고, V8 가솔린 트림 한정으로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한 바 있다. 추가로 국내 시장에도 PHEV 라인업을 출고하기 시작할 예정이다. 앞서 5세대 레인지로버의 주요 변경점은 미니멀 디자인과 디지털 친화 인테리어였다. 이번 2024년도 연식변경은 남아있던 센터콘솔의 모든 버튼들을 삭제하고, 기어노브와 엔진 스타트 버튼만 남겨두는 마이너 체인지도 포함된다.
JLR의 자존심과 같은 '레인지로버'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오랜 재정난으로 인해 황금기와 암흑기가 교차되는 역사를 보였다. 휴식기를 알린 재규어와 다르게, 현재의 랜드로버는 다시금 시장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역사를 뒤엎고 랜드로버가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혁신적인 '브랜딩' 전략이 있었다. 디자인 개혁과 디지털 친화를 선도한 것이다. 그리고 2023년 재규어 랜드로버는 공식적으로 사명을 JLR로 변경한 뒤, 아예 레인지로버를 차종이 아닌 계열 브랜드로 배치한 바 있다. 전동화 시대의 도약, '리이매진' 의 미래를 그린다.
그런 JLR의 최고급 SUV 라인업이라고 볼 수 있는 '레인지로버'는 오랜 디자인 헤리티지를 답습하고 있다. 대신에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미래지향성을 더한 셈이다. 영국 태생 브랜드의 고질적 단점으로는 제품 결함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고자 독일 BMW사의 엔진을 납품 받고, 디지털 장비는 한국의 LG 이노텍과 협업하면서 완성도를 높였다. SUV에 적용되는 섀시 기술이나 럭셔리 소재는 원래부터 랜드로버의 선도 분야였다. 앞으로의 리이매진 전략에서 소프트웨어 안정화가 우선시 여겨진다면, 랜드로버의 시장 영향력은 나아질 것이라 예상된다.
본론으로 돌아와 레인지로버의 익스테리어 디자인은 오랜 레이아웃을 유지해왔다. 대신 더 깔끔하고 직관적인 그래픽을 추구한다. 그런 랜드로버의 디자인 방향은 정답이 존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필수 불가결한 파팅라인과 노치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차세대 레인지로버의 전면 디자인을 보면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구성요소들이 분명하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은 하나의 곡면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정면에서 바라볼 때는 피해갈 수 없는 범퍼와 보닛, 그릴, 헤드램프 사이의 분할선을 창의적으로 지워냈다는 점이 놀랍다.
측면 디자인도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인다. 우선 필러의 돌출부가 최소화되었다는 것, 자연스럽게 연결된 사이드 글래스는 플러시 글레이징 공법에 의해 구현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자동차와 다르게 창틀, DLO가 없다. 히든 웨이스트 피니셔 기술로 유리의 끝단을 바디 패널의 곡면 끝부분에 내장시켰다. 이 외에도 후드와 1열 도어의 분할선을 통합시킨점, 바디 클래딩 면적을 최소화했다는 점, 오토 플러시 도어 등 눈에 띄는 노력들이 많이 보인다. 큰 덩치가 느껴지면서도 우아한 레인지로버의 측면 실루엣은 그 자체가 캐릭터가 된다.
과장되었던 차체 볼륨이 후면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보트테일 실루엣을 택했다. 리어 디자인도 극단적 간결화를 추구했다. DRL이 점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테일램프가 가니시와 일체화된 듯 보인다. 버티컬 타입의 램프에 후미등이 점등되고, 또 가니시에는 히든타입 턴시그널이 포함된다. 범퍼를 감싸는 언더커버조차도 고급스러운 소재감이 인상적이다. 디자인 요소를 추가하는게 아닌 빼내기 위하여 창의성을 발휘하는 랜드로버의 디자인 하우스, 그런 역발상의 접근이 랜드로버의 보수적인 디자인이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비결같다.
JLR이 추구하는 디지털 친화가 온전히 정답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특히 럭셔리 SUV라는 장르는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닌 기성세대를 주요 타깃으로 지정한다. 분명 직관적인 물리 버튼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던 럭셔리' 시대에 일관적인 자세로 대응하는 JLR의 뚝심만큼은 인정할만 하다. 그리고 대비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13.1인치 피비프로 스크린의 햅틱 반응과 빠른 피드백은 사용성이 뛰어났다. 디스플레이 테마도 직관적인 편이며, 시트 기능이나 공조 기능들도 큰 크기의 테마로 직관적인 조작이 가능했다.
주행이나 터레인 모드는 사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버튼이 아니라 그 부재를 체감하기 어렵다. 단, 버튼을 누르면 상승하여 고급스러운 작동감을 보이던 특유의 감성이 사라진 다는게 아쉽다. 공조장치와 터레인 모드 등 다양한 버튼을 누락시킨 대가로 수납 공간이 늘어났다. 기업 입장에서는 원가 절감을 이룰 수 있다. 연식 변경 이후 레인지로버 AB 트림에도 SV 리얼우드&가죽 스티어링 휠이 적용된다. 실내를 마감하는 다채롭고 화료한 소재를 보고있자면, 레인지로버가 지닌 럭셔리 SUV에 대한 자긍심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긴 하다.
휠베이스가 짧은 SWB 사양도 웬만한 2열 옵션은 전부 탑재되어 있다. 2열 모니터와 스크린 타입 센터콘솔, 전동식 리클라이닝이나 선블라인드 등 웬만한 쇼퍼드리븐 세단보다도 편의장비가 풍부했다. 이런 시트포지션의 자유도는 오히려 세단이 아닌 SUV라서 가능한 점이기도 하다. 심지어 암레스트와 컵홀더까지 전동식으로 작동된다. 테일게이트도 레인지로버의 오랜 전통을 따른 클램셀 게이트 방식, 상하부 모드 전동기로 움직이는건 기본이다. 트렁크 내부의 러기지 스크린까지 전동식으로 접었다 펼칠 수 있다.
시승차량 레인지로버 P530 사양에는 가솔린 V8 트윈터보 엔진이 적용되었다. 변속기는 역시 8단 토크컨버터, 연식변경 이후 48V 마일드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추가로 탑재된다. 시동 모터를 겸하는 48V 제너레이터, BISG 방식이다. BISG를 채택함으로써 엔진 시동이 정말 매끄럽게 걸리고, 정차 후 재출발 시 오토스탑의 개입을 체감하기 어렵다. 공인 연비는 7.8km/l, 그리고 오프로드에서 지형에 따른 주행모드 세팅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어댑티브 오프로드 크루즈 컨트롤' 모드가 추가된다. 이 외에 주행에 관련한 연식변경의 차이는 없다.
최고출력 530HP 최대 토크 76.5Kg.m의 힘을 발휘하는 엔진은 대략 2.8톤의 차체를 가볍게 이끈다. 공식적인 제로백이 4.6초다. 엑셀 페달을 가볍게 밟아도 답답함없이 나아가고, 오르막길에서도 힘에부친 부밍 사운드가 전혀 없다. 대신 운전의 재미에 대한 자극은 본성적으로 택하지 않았다. 다이내믹 모드에서도 유입되는 엔진음이 크진 않고, 엑셀 반응은 더욱 예민해 지지만 그만큼 높은 중량과 무게중심이 체감가는 경향을 보인다. 더욱 단단해진 에어스프링이나 묵직한 스티어링도 통상 딱딱하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었다.
대신 일반 주행모드에서의 고요한 승차감이 레인지로버의 진리다. 정말 부드럽고 편안하다. 뛰어난 정숙성과 부드러운 변속감, 특히 섀시는 노면과 차체가 분리되어 있는 느낌으로 거동한다. 그 가운데서 열심히 움직이는 에어 서스펜션은 무거운 차체를 받치고, 사소한 요철들을 효과적으로 걸러내준다. 기본 스티어링 감각은 이전의 레인지로버에 비해 많이 가벼워졌다. 그에 비해 롤센터는 조금 더 낮아진 느낌, 후륜조행 기능까지 기본화하여 회전 반경이 축소된다. 그 목적은 역시 다이내믹한 주행이 아닌 큰 차체가 전하는 불편함을 최소화 하기 위한 장비처럼 느껴진다.
에어스프링 서스펜션은 오프로드 성능을 확보하기 위한 솔루션이 되기도 한다. 차고 조절과 지형반응 시스템을 통해 차체 하부를 보호하며 거친 도로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그렇지만 랜드로버의 신규 브랜딩 전략에 따르면, 오프로드 특화 차종은 디펜더나 디스커버리가 담당할 듯 보인다. 레인지로버는 온로드에서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럭셔리 SUV 브랜드다. 뛰어난 인식률의 ADAS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최적화된 세미 플로팅 클러스터, HUD와 대화면 스크린 등 주행중에 알게모르게 디지털 친화의 많은 혜택을 받고 있었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LWB P530 오토바이오그래피 2024년 연식변경 모델을 시승했다. 주제는 더욱 극단에 가까워진 디지털 친화다. 물리 버튼 대부분이 사라지고, 주행과 관련된 소프트웨어 기능이 확장되었다. 여전히 웅장한 디자인과 화려한 소재는 레인지로버의 격식을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JLR의 '리이매진' 전략에 의한다면, 차세대 레인지로버는 더욱 급진적인 변화를 택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과도기에 있는 현시점에서, 레인지로버가 품은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나 모두 호화로운 성능을 자랑한다.
글/사진: 유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