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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요? 지금 자동차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두 영웅의 등장으로 흥미롭습니다. 바로 제리 맥거번과 토마스 잉엔라트가 그 주인공인데요. 각각 넘버 쓰리 정도의 위치에 있다가 정상에 서며 쓰러져가는 브랜드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공통점이 있습니다.

혹자는 ‘디자인 수장 하나 바꿨을 뿐인데 무슨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기술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시점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현실입니다. 또, 자동차 메이커들의 디자인 작업이 체계화되어 있어 어느 한 명이 모든 디자인을 맡진 않기에 브랜드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석 디자이너의 능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매년 두 자릿수 성장, 랜드로버 제리 맥거번(Gerry McGovern)

2008년 6월 포드는 랜드로버를 매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포드가 가졌던 프리미엄 메이커 중 가장 애착을 가졌었지만 4억 파운드에 가까운 순손실을 낸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끝까지 고집할 순 없는 노릇이었죠. 포드 또한 리먼 사태로 제 코가 석 자였으니까요. 해서 재규어와 함께 인도의 공룡인 타타그룹에 팔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애물단지였던 두 브랜드는 10년도 채 안 되어 전 세계 자동차업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두 자릿수 매출 증가율을 기록했고 지난해의 순이익이 20억 4,000만파운드(약 2조 8,310억원)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랜드로버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모기업인 타타그룹의 든든한 재정지원과 CEO로 발탁된 랄프 스페서의 정교한 재건 프로젝트 덕분이었죠. 그리고 그로부터 디자인 전권을 위임받은 제리 맥거번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리 맥거번은 영국 코번트리 디자인 스튜디오를 거쳐 1978년 크라이슬러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그는 대학 등록금을 크라이슬러로부터 받은 장학생이었죠. 1999년부터 포드와 인연을 맺었는데 고급 브랜드인 머큐리와 링컨의 디자인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랜드로버 디자인을 맡게 되었죠.

제리 맥거리표 레인지로버의 신호탄 LRX 컨셉트

그는 안팎으로 닥친 위기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수요를 끌어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그의 지휘 하에 처음으로 완성한 LRX 컨셉트를 공개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이는 2011년 9월 레인지로버 이보크로 양산됩니다.

디스커버리 스포츠

랜드로버 디자인은 이보크 출현 전후로 나눠도 될 만큼 파격적인 변화였습니다. 그 이전의 포트폴리오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로 불릴 정도로 고급스럽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루하고 답답했죠. 해서 젊은 수요를 끌어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추억 되새김질에 익숙한 나이 지근한 분들의 수요에 연명하다가 서서히 잊히는 뻔한 스토리였죠.

제리 맥거번의 이보크는 랜드로버를 단숨에 가장 젊고 스타일리시한 브랜드로 바꿔놓았습니다. 쿠페와 SUV를 접목한 세련된 디자인으로 데뷔와 동시에 셀러브리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자연스럽게 대중들에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 타는 차’로 각인되었죠.

그리고 이보크의 디자인은 레인지로버와 디스커버리 스포츠, 디스커버리 등 다른 라인업에 스며들며 브랜드 전체의 분위기를 젊게 바꾸고 있습니다. 새롭고 적극적인 수요는 곧 판매량으로 이어져 지난해 글로벌 판매 대수가 처음으로 40만 대를 넘었고 올 상반기에만 26만 1,194대가 팔려 지난해보다 15%나 성장했습니다.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국내에서도 인기 모델은 수개월을 기다려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지요. 불과 10여 년 전 파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토르의 망치로 이룬 신화, 토마스 잉엔라트(Thomas Ingenlath)

랜드로버가 내부 인원을 발탁해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웠다면 볼보는 용병을 스카우트해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의 뇌리 속엔 층층이 쌓은 볼보 자동차들이 강하게 남아 있을 겁니다. 볼보의 튼튼함을 알리고자 했던 포스터인데요. 한동안 이 때문에 볼보는 안전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죠.

하지만 시대는 흘렀고 ‘튼튼함’은 더 이상 볼보만의 자랑이 아닌 모든 자동차 브랜드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이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해마다 치러지는 충돌테스트 결과가 그대로 노출되면서 메이커들은 사활을 걸고 안전한 차 만들기에 매진했죠.

볼보 850(1991~1997)

차별점이 옅어진 볼보에게 공교롭게도 그동안 ‘튼튼한 차’ 이미지를 심어준 각진 디자인이 역풍을 맞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볼보를 ‘투박하고 구식인 차’로 인식하게 되었죠. 해서 2007년부터 디자인에 곡선을 가미합니다. 2009년 포드로 떠났던 피터 호버리가 복귀하면서 이런 흐름은 더욱 강해졌는데 완성도에선 호불호가 갈립니다. 몇몇은 볼보의 정체성도 잃고 세계적인 유행도 따르지 못했다고 혹평했죠.

설상가상으로 2010년 포드는 경영난을 이유로 볼보를 중국 지리 자동차에 넘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리가 볼보의 단물만 쏙~ 뺄 것이라고 걱정했어요. 2012년 20여 년간 볼보 디자인을 책임진 호버리가 지리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런 걱정은 현실이 되나 싶었죠.

하지만 호버리의 지리 이동은 드라마틱한 반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임으로 볼보 수석 디자이너에 오른 토마스 잉엔라트는 결코 호버리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습니다. 폭스바겐에서 20년 남짓 글로벌 트렌드를 경험한 베테랑이었죠. 1964년 독일태생인 그는 영국 RCA를 졸업하고 아우디, 폭스바겐, 스코다에서 다양한 모델을 디자인하며 전통과 미래를 아우르는 경험을 반복합니다.


P1800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볼보 디자인이 새로워질 수 있다고 믿게 되죠. 볼보 디자인을 맡은 잉엔라트는 볼보의 투박함을 벗기 위해 역대 모델 중 가장 스포티한 모델을 찾습니다. 1961년 데뷔한 P1800이 제격이었죠. 젊은 층을 겨냥해 개발된 P1800은 볼보 모델 중 가장 역동적인 모델이었으니까요.


Coupe Concept

잉엔라트는 무릎을 딱 쳤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실행에 옮겼죠. 2013년 가을 선보인 ‘쿠페 컨셉트(Coupe Concept)’가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P1800의 프로포션을 가져오되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가미했습니다. 앞바퀴굴림 베이스의 플랫폼임에도 마치 뒷바퀴굴림처럼 프런트 오버행을 짧게 했습니다. 보닛은 전통적인 볼보보다 길어졌고 휠하우스는 어깨 뽕처럼 한껏 힘을 주었어요.

그리고 북유럽 신화 속 ‘토르의 망치’를 연상시키는 ‘T’ 자형의 헤드램프와 음각으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그릴을 통해 새로운 볼보의 얼굴을 완성했습니다. 이듬해엔 볼보를 상징하는 왜건의 이미지를 재해석했고 2015년 드디어 이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입힌 양산형 XC90을 시장에 내놓습니다.

XC90은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누립니다. 글로벌에서 190여개 이상의 디자인상을 받았고 구매자는 줄을 잇고 있습니다. 지금도 XC90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예테보리 토슬란다 공장은 24시간 풀가동으로 해도 주문량이 3-6개월 치나 밀려 있습니다. XC90 출시에 힘입어 지난해 볼보는 처음으로 50만 대의 벽을 돌파했고 올 1분기엔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2018년이면 미국에 연간 10만 대 규모의 새로운 공장을 짓게 되어 판매량은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XC90을 통해 선보인 젊은 볼보 디자인은 S90과 V90, V90 CC를 시작으로 XC60, XC40, V40 등 내년부터 차례로 등장할 신세대 볼보 모델에 투영될 예정입니다. 잉엔라트에 따르면 앞으로 4년 동안 모든 모델에 토르의 망치와 음각 그릴이 사용됩니다. 그렇게 되면 토슬란다 공장 앞의 줄이 더 길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박영문 기자

spyms@encar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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