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6 차돌박이
│1986년 첫 출시된 '회장님을 위한 차' 그랜저
│1986년 제정된 '노동자를 위한 법' 최저임금법
│36년 동안 '성공의 상징' 그랜저와 '성공의 의미'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최저임금으로 본 그랜저의 성공신화 3부작
▶ 여는 글
1986년 미쓰비시와 현대의 공동 개발로 탄생한 [그랜저]는 당대 첨단 기술이 집약된 최고가의 [회장님 차]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최저임금이 최초로 생긴 1988년 기준,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13년 3개월 동안 일해야 간신히 '깡통 트림'을 살 수 있는 그야말로 '꿈의 자동차' 였죠.
98년, 3세대 그랜저 XG는 회장님이 뒷좌석에 앉는 ‘쇼퍼드리븐’에서 직접 운전을 하는 ‘오너드리븐’으로 차량의 정체성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중형차’ EF쏘나타의 플랫폼을 사용한 그랜저는 더 이상 ‘현대에서 가장 좋은 차’가 아니게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급 플래그십 차량에 탑재되던 고급 옵션과 고배기량 트림구성에 힘입어 중형차와는 확실하게 차별화됐고, 사람들은 ‘직접 운전하는’ 그랜저에 열광하며30만 대 이상이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랜저가 시장에서 잘 팔리면 팔릴수록 그랜저의 희소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이는 현대에 있어 양날의 칼과도 같았습니다. 과거 1세대 ‘각그랜저’ 시절의 권위와 회장님이나 탈 수 있는 자동차라는 ‘성공의 상징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죠. 사상 최대의 대성공을 거둔 그랜저 XG 너머로, 현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과거 각그렌저 시절 ‘명품’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을 것이냐 현재 진행형인 ‘대중적인 인기’에 집중할 것이냐 이 양립할 수 없는 외통수 속에서 현대는 다시 한번 기막힌 묘수를 떠올렸습니다.
▶ 대한민국 최초로 '카푸어'를 만든 차, 그랜저 TG
흔히 부자는 어디 가서 자기가 부자라는 말을 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랜저는 정확히 정 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성공의 상징’이라고 본격적으로 포지셔닝하기 시작했던 거죠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는 그랜저 TG 페이스리프트의 광고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겁니다. 광고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되었고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로 상대를 평가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교과서에 당당히 실리는 위명을 떨쳤던 CF였죠. 이렇게까지 그랜저가 스스로를 성공의 상징이라고 포장해야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그랜저 TG시절부터, 그랜저는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죠
XG 시절까지 그랜저는 그래도 ‘용의 꼬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중형차인 EF쏘나타의 플랫폼을 사용하긴 했지만, 외장 디자인은 최상급 플래그십인 ‘회장님 차’ 에쿠스와 패밀리룩을 맞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4세대 TG에 접어들면서 그랜저는 본격적으로 NF소나타와 패밀리룩을 맞추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뱀의 머리’를 지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뱀의 ‘머리’로 존재하기 위해 그랜저 TG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랜저 TG는 광고 카피처럼 ‘성공의 상징’으로서의 기능, 정확히 말하자면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는’ 기능이 탁월한 차였습니다.
그랜저 TG는 쏘나타와 패밀리룩을 맞춘 것과는 별개로, 후면 리어램프를 일직선으로 잇는 차별점을 보여줬습니다. 이는 당시 리어램프를 세로로 배치하던 당대의 디자인 트렌드와는 정면으로 역행하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돌발행동을 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바로 ‘회장님 차’ 시절의 1,2세대 그랜저의 디자인 헤리티지를 계승했던 거였죠. 그랜저 TG가 ‘회장님 차’ 스러움을 추구했던 요소는 ‘뒷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랜저 TG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전고를 자랑합니다. 여태까지 나온 6세대 그랜저를 모두 통틀어 가장 높은 전고를 자랑했고, 당시 플래그십 차량으로 여겨지던 체어맨, 에쿠스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심지어 현대 제네시스의 플래그십인 현행 G90보다도 더욱 높은 헤드룸을 자랑합니다.
웬만한 회장님 차들보다도 높은 전고에서 뿜어져나오는 헤드룸은 ‘중형차’ 쏘나타와 같은 플랫폼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중형차’ 쏘나타와는 끕이 다른 ‘뽕’을 전해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가속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엔진 내구성과 정숙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과거 3세대 그랜저 XG시절에 삭제되었던 2열 전동 리클라이닝 기능과 전동식 리어커튼 기능을 부활시키는 등 곳곳에서 ‘쇼퍼드리븐’의 감성을 느끼게 해주는 차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고급지게’보이는 전략을 택한 것과는 별개로, 그랜저 TG는 그랜저 사상 최초로 ‘최저임금’으로 살 수 있는 그랜저였습니다.
그랜저 TG가 출시된 2005년의 최저임금은 2840원. 가장 저렴하게 출시된 그랜저 TG 하위 트림의 가격은 2587만원이었습니다. 최저임금으로 9109시간치 시급이었고, 하루 8시간 주 5일제 월 노동시간 209시간으로 환산해도 ‘3년 7개월’이면 그랜저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버는 돈을 쏟아부어 그랜저를 구매하는 ‘그랜저 타는 거지’라는 신조어가 언론에 등장하면서, 그랜저 TG는 국내 최초로 공식적인 ‘카푸어’를 만든 차로 기억됐습니다.
▶ 부장님이 자기도 MZ라고 친한척하기 시작했다...그랜저 HG
그랜저 TG의 성공 이후 5세대 그랜저는 더욱 적극적으로 ‘뱀의 꼬리’ 전략을 내세웠습니다. 뒷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던 쏘나타 YF의 ‘플루이딕 스컬프쳐’ 패밀리룩을 기반으로 전 세대 대비 휠베이스를 45mm나 늘리면서 독보적인 실내공간을 확보했죠.
특히 이 시기부터 그랜저는 메인 타겟층을 30~40대로 낮추면서 한층 ‘젊은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주인공 현빈 씨를 그랜저 HG 홍보대사로 기용했는데, 이는 현빈 씨가 드라마 상에서 ‘성공한 젊은 CEO’역할을 맡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 세대 그랜저 TG가 그렇게 강조한 ‘성공’의 이미지에, ‘젊음’을 덧씌우려고 했던 거죠.
그에 걸맞게 그랜저 HG는 다양한 편의장비 및 주행보조기능으로 운전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줬습니다. 국내 최초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차로이탈 경고와 후측방 충돌 경고, 파킹 어시스트 기능 등등은 가뜩이나 덩치가 큰 그랜저 HG를 운전하기 어려울까봐 구매를 망설이던 30대 신규 젊은 고객층들을 공략하는 카드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젊은층 공략 비결은 가격이었습니다. 2011년 최저임금 4320원 대비, 가장 저렴한 하위트림 그랜저 HG의 가격은 3112만원이었습니다. 출시 초기에는 가격 인상분에 대한 비판이 상당했지만 막상 출시를 해보니 결과는 ‘대박’ 이었습니다. 각종 주행보조기능 추가 덕분에 가격 인상에 대한 여론이 희미해진 것은 물론, 물가나 임금이 인상된 것에 비해 그랜저의 가격상승폭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구하기 쉬워졌기 때문이었죠. 최저임금 노동자 기준, 주5일제로 2년 11개월을 일한다면 그랜저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세대 그랜저는 상품구성과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사전예약 기준 30~40대 구매층이 41%에 달했고, 이는 그랜저 구매층의 완벽한 세대교체를 의미했습니다.
▶ 벗어날 수 없던 ‘원죄’ 또다시 시작된 '성공팔이’…6세대 그랜저 IG
6세대 그랜저는 기세를 몰아 더욱 젊고 스포티한 감성을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외형부터 ‘스포티’의 대명사 아우디와 디자인 감각이 유사해졌다는 평과 함께 기존 그랜저에서 느껴지던 ‘웅장한’ 느낌이 사라졌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단단하게 조정된 주행감성과 더불어 ‘역대급’ 상품구성을 앞세운 6세대 그랜저IG는 출시와 동시에 돌풍을 불러왔습니다.
가장 낮은 최저 트림에서 나파 가죽시트가 삭제되긴 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은 변화였습니다. 나파 가죽은 아니지만 여전히 천연 가죽시트와 1열 열선이, 2중접합유리와 열선 스티어링 휠, 후방카메라 등을 기본 옵션으로 넣으면서 ‘그랜저는 깡통이라도 깡통이 아니다’라고 호평받았죠. 특히 그랜저에 최초로 적용된 지능형 안전기술, 그 중에서도 전방 충돌방지 보조 기능은 ‘한 번만 제대로 멈춰도 옵션값 본전을 뽑는다’는 호평과 함께 그랜저 IG의 상품성을 더욱 높여줬습니다. 그 결과 그랜저 IG는 다른 준대형 차량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독보적인 준대형차 1위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혔습니다.
하지만 사실 6세대 그랜저는 5세대 HG시절부터 이어져 온 ‘원죄’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타2엔진 결함 문제였죠. 특히 현대가 이 결함을 인지하고도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더불어, 수습 및 보상 과정에서 미국 소비자와 국내 소비자들을 차별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현대’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가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위기의 현대는 또다시, 그랜저에 ‘성공 마케팅’을 시작했습니다.
논란의 세타2 엔진을 제거하고 새로 엔진으로 돌아온 그랜저 IG 페이스리프트, 일명 ‘마름저’는 다시금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해서 돌아왔습니다. 풀체인지급으로 대대적인 변화를 줬던 디자인은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기존 IG에서 호평받았던 전방충돌방지 보조 시스템을 기본 탑재하면서 상품성을 크게 강화했죠. 또한 과거 ‘부의 상징’으로서의 그랜저를 ‘성공’이라고 정의했던 것보다 의미를 넓혀서, 다양한 시각의 ‘멋진’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2020 성공에 대하여’ 광고 캠페인으로 다시금 그랜저에 ‘성공 마케팅’을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는?
사전계약 첫날, 역대 한국 자동차 최대 사전예약 기록을 세웠습니다. 준대형차가 ‘사전예약 최고기록’을 세운 현상에 대해 해외 자동차 매체들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로 이례적인 대성공이었죠. 그랜저의 ‘성공 마케팅’은 또다시 성공이었습니다.
▶ 하지만…그랜저가 아직도 ‘성공’의 상징일까?
하지만 그렇게 ‘대성공’을 거둔 그랜저 IG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실물 가치’는 어땠을까요? 과거 회장님들을 태우던 1세대 각그랜저는 1988년 기준으로 최저임금 노동자가 13년 3개월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살 수 있던 차였습니다. 당시 각그랜저는 최저임금 노동자가 계약조차 할 수 없는 차였죠.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뒤 출시된 그랜저 IG 페이스리프트의 가격은 2022년식 기준 3392만원, 22년의 최저임금은 9160원이었습니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는 사람이더라도 하루 8시간씩, 주5일제로 일해도 ‘최신형 그랜저’를 사는데 2년이 채 걸리지 않게 된 겁니다. 심지어 과거 ‘각그렌저’를 사려면 ‘주7일제’로 계산했을때, 13년 3개월이 필요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최저임금 대비 그랜저의 가치는 과거에 비해 1/10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그랜저를 여전히 ‘성공의 상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답은 인문학에 있었습니다
-> 3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