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0 유현태
전동화 시대가 도래한 이후 SUV와 세단의 경계는 더욱 허물어져 가고 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 시절보다도 차량의 항력계수나 공차중량에 대한 기준치가 높아진다. 또 생산성 개선과 원가 절감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매끈하고 획일화된 차체 형상을 추구하게 된다. 레거시 브랜드가 공개하는 대부분의 SUV가 비슷한 분위기이다. 분류가 SUV 일지라도, 21세기 SUV의 목적은 과거와 동일하지 않다. 정통 SUV를 모티브로 하는 차종이 아니라면 감성보다는 경쟁력을 우선시 여기고 있다.
레거시 브랜드들은 전기차와 내연기관의 VI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기차 스타트업들의 강세에 밀려나는 듯 했지만, 이제는 각 브랜드마다 전기차의 비전과 네트워크, 기술력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SUV의 표준이 완전히 뒤바뀔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EQ 브랜드의 SUV만 보아도 기능 주의의 디자인을 택했다. 물론 그 결과가 성공이라고 판단할 수 없겠지만 방향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말, 북미시장을 중심으로 크기와 육중함을 과시했던 SUV는 전기차의 대중성으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23년 GLE클래스의 페이스리프트를 공개했다. 익스테리어 디자인의 디테일과 옵션 구성에 차이가 있다. GLE클래스는 북미시장을 타깃으로 1997년 G클래스의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개발된 이래, SUV의 대중화와 함께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북미기준 중형 SUV로 분류된다는 넓은 공간, 강인함을 강조하는 익스테리어와 오프로드 기술력을 꾸준히 개선해 왔다. 4세대 GLE클래스의 페이스리프트는 비교적 작은 변화로 마무리되었고, 변경된 디지털 그래픽이 의미하는 바는 EQ 브랜드와의 통일성으로 해석된다.
시승 차량은 메르세데스-벤츠 GLE클래스 GLE 300d 4MATIC A/T 모델이다. 현재 GLE클래스는 2.0L급 디젤엔진을 채택한 300d 트림과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을 채택한 450트림으로 구분된다. 두 차량 모두 전자식 4매틱 시스템이 기본이며, 가솔린 모델의 경우 AMG라인 익스테리어 패키지가 포함되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경우 GLE '쿠페' 전용으로 출시되었다. 시승 차량 300D 트림에도 어댑티브 에어 서스펜션, 고스트 클로징 도어, 파노라믹 선루프 등 편의 장비와 각종 첨단 운전보조 장치가 도입되기 때문에 옵션이 아쉽지는 않다.
GLE클래스에는 역시 메르세데스-벤츠의 '감각적 순수미' 철학이 적용되어 있다. 프레임이 없는 라디에이터 그릴은 육각형 대신 팔각형의 윤곽선으로 단단한 인상을 부가했으며,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구현된 쿼드램프 DRL은 역동적인 인상을 남긴다. 함께 두 점으로 분할된 선은 'E' 세그먼트를 의미한다. 베이스모델의 범퍼는 두꺼운 스키드플레이트와 크롬 소재의 에이프런으로 마감되어 튼튼함을 강조했다. 특히 짧은 길이의 프런트 오버행은 이탈 각을 고려하는 SUV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보닛의 라인도 듬직함을 가미하는 요소중 하나다.
페이스리프트인 만큼 측면 디자인에 특별한 변화는 없다. 이전 GLE클래스와 유사하며, C필러의 두꺼운 폭이 구 M클래스로부터 전해져오는 헤리티지 캐릭터와 같다. 뒷유리를 랩 어라운드 스타일로 마감하면서, 개방감과 단단함 두 가지 성격을 충족시킨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감각적 순수미 철학을 따라 측면 캐릭터 라인은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고, 유연한 굴곡을 품은 바디 패널이 고급스러운 실루엣을 제공해 준다. 차체 하부를 감싸는 슬림한 스키드 플레이트와 두꺼운 스포크를 지닌 휠에서 듬직함을 느껴볼 수 있다.
뒷모습 역시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C필러 뒷면 창이 벨트라인을 따라 뒷유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테일램프와 크롬 가니시가 안정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페이스리프트 이후에는 테일램프의 그래픽이 달라지며 선보다는 면을 강조한 인상이다. 이 외에는 넘버가드 하단부에 테일게이트를 가르는 주름이 있으며, 두터운 플라스틱 범퍼와 트윈 머플러 팁, 그리고 두꺼운 언더커버 등의 액세서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GLE클래스의 후면 디자인은 디테일보다는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신경 쓴 의도가 느껴진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그저 아늑한 프리미엄 SUV와 같다. 운전석은 와이드콕핏 스타일로 디지털 UI를 완성하고, 센터페시아에는 간소화된 버튼만이 남아있다. 3스포크 타입 스티어링 휠은 블랙 하이그로시 패널로 멋을 더했으며, 인스트루먼트 패널이나 센터콘솔 마감을 우드 소재로 하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인테리어를 감싸는 앰비언트 라이트와 알루미늄 패널도 트렌디하다. 센터콘솔에는 차고 조절 레버와 손잡이가 마련되어 SUV의 감성을 더하며, 대시보드에 자리 잡은 사각형의 에어벤트가 GLE클래스만의 차별점이 된다.
2열 공간은 상당히 여유롭다. 전폭 대비 전고가 높은 편이며, 센터터널도 낮다. 광활한 넓이의 파노라믹 선루프가 탑재되어 있어 체감상 느껴지는 개방감은 더욱 탁월하다. 선루프는 단일 블라인드로 차단된다. 2열 편의 장비로는 사이드 에어벤트와 2존 독립 공조, 시트 열선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트렁크 공간을 확인하면 전장만큼 전폭이 상당히 넓다는 사실이 체감된다. 에어매틱 서스펜션의 탑재로 승하차 시 후륜측 차고를 낮추는 것도 가능하다. 전체적으로 메르세데스-벤츠의 디지털 감성과 고급스러운 소재 선정이 매력적인 실내 공간이었다.
페이스리프트 이후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 'EQ부스트'가 기본화되었다. 4기통 디젤 엔진을 채택하였음에도 시동이 굉장히 부드럽게 걸린다. 엑셀을 밟아도 엔진의 소음은 크게 유입되지 않았다. 디젤엔진의 소음과 진동 자체는 억제할 수 있는 한계가 있지만, 메르세데스-벤츠의 차음 성능과 마감이 훌륭하다. 초반 응답성이 예상보다 예민했지만, 전반적인 발진감은 부드럽고 선형적이다. 육중한 차체에 탑재된 2.0L급 엔진, 그 선입견에 비해 경쾌한 가속감이라 여길수도 있겠다.
GLE300D 트림에 탑재된 직렬 4기통 디젤 엔진은 최고출력 269마력, 최대토크 56.1KgM을 발휘 한다. 공차중량은 2460Kg으로 시트상의 출력이 여유로운 수치로 느껴지진 않는다. 대신 'EQ부스트'가 차량 급가속시 최대 22마력, 25토크의 힘을 더해준다고 한다. 차량의 최대 출력과 토크가 그만큼 증가하진 않고, 급가속 시 일시적으로 힘을 더해주는 개념이다. 합산 최대토크와는 다르다. 제조사에서 발표한 제로백은 약 6.9초로 EQ 부스트의 도입은 0.1초 정도 제로백 성능을 앞당겨 준다고 설명한다. EQ부스트의 즉답적인 개입은 체감할 수 있었다.
EQ부스트가 일시적으로 개입한다고 표현했으나 무조건적인 단점은 아니다. 기존 스트롱 하이브리드 대비 주행감이 자연스럽다. 11.4KM/L 수준의 연비는 분명 개선된 수치일 것이다. EQ부스트의 조합으로 디젤엔진 치고는 고속 영역까지 꾸준한 토크감을 제시해 주며, 9단으로 촘촘하게 맞물린 토크컨버터 변속기도 민첩하고 부드러운 반응을 보여준다. 함께 전반적인 승차감은 그저 평온하다. 만족스러운 방음과 부드러운 변속기, 그리고 어댑티브 에어매틱 서스펜션의 조화는 탑승객에게 불쾌함을 남길 수 있는 충격이나 소음 등을 인위적으로 차단해 준다.
이 인위적인 감각 덕분에 고급스러운 승차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행 시 느껴지는 물리량은 크지만 요철에 대한 반응은 가볍다. 스티어링 휠은 예상보다는 가볍고 예민한 편이다. 약간의 무게감, 그래도 스포츠 모드로 전환하면 감도는 더욱 무거워진다. 스포츠 모드에서는 디젤엔진의 사운드와 진동이 증폭되면서 에어매틱 서스펜션의 차고가 낮아진다. 댐핑력이 강해지면서 다소 노면 충격이 올라온다. 그래도 딱딱한 수준까지 극적인 변화가 다가오진 않는다.
엑셀을 깊게 밟으면 즉답적인 부밍 사운드와 변속감이 나타난다. 느껴지는 가속감과 긴장감은 크게 증폭된다. 사운드 제너레이터의 소리가 다소 인위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꽤나 흥미롭다. 변속기는 더욱 높은 RPM까지 대응하며, 급가속 시에도 2.5톤의 물리량은 딱히 체감가지 않았다. 에어스프링은 묵직한 차체를 탄탄하게 지지해 준다. 노면을 움켜쥐는 느낌은 없더라도 차체에 가해지는 흔들림만큼은 억제해 준다. 전반적인 코너링 감각은 약간의 오버스티어에 가깝다고 느꼈다. 전폭이 넓어서인지 예상보다 회전반경이 짧았다.
물리량의 한계가 있다보니 고속 영역에서까지 '펀 드라이빙'이라 느낄 부분은 없다. 넓은 면적으로 인한 풍절음과 저항, 높은 무게중심으로 차량의 전반적인 반응은 금방 둔화된다. 섀시만이 아니라 구동 계통의 세팅을 포함한다. 정리하자면 딱 실용적인 영역에 필요한 출력, 반응성이나 주행감에 대한 아쉬움은 없고 기본적인 성격은 '컴포트'에 집중하고 있다. 상시 4륜구동과 에어매틱 서스펜션은 험로 주행에서의 성능도 감안했으며, 2.5레벨 수준의 첨단 주행보조 장비들이 차량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준다. 그런 안정감이 GLE클래스의 매력라고 본다.
메르세데스-벤츠의 GLE클래스 페이스리프트를 시승했다. 전반적으로는 대중형 패밀리카의 최고봉에 있는 모델이 아닐까 싶었다. 세련된 디자인, 여유로운 공간, 특히 따뜻한 감각의 소재로 구성한 인테리어는 그저 안락하다. 파노라믹 선루프와 4존 공조 장치, 에어매틱 서스펜션 등의 옵션은 차량 탑승객 모두가 만족할 만한 구성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브랜드의 크로스오버가 지향하는 성격이겠지만, 메르세데스-벤츠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더욱 명확해 보였다. 오랜 시승 동안 준대형 SUV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평온함과 안정감을 경험했다.
글/사진: 유현태